우리가 현대 문학사를 통틀어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작가를 꼽는다면 오직 존 르 카레를 떠올릴 것이다. 유럽을 뒤흔든 사기꾼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비밀 조직 MI6에 입성해 요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동서냉전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존 르 카레John Le Carré’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해 60여 년간 전 세계 문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실버뷰』는 존 르 카레가 『민감한 진실』을 낸 뒤 십여 년에 걸쳐 퇴고를 반복해오다 결국 출간하지 못한 채 미완성 원고로 남아있던 것을 아들 닉 콘웰이 마무리해 발표한, 공식적으로 존 르 카레의 스물여섯 번째 장편소설이자 유작이다. 냉전 직후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지금의 영국으로 시점과 배경을 바꿨으나,
스파이라는 조직 내의 정치적 양면성에 대해 구현하는 필력은 한층 더 실재에 가까워졌다. 특히 영국이 취하는 외교적 자세로 인해 르 카레가 겪어온 고초들을 과거 회상 장면에 녹여내 극도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우아하게 이어지는 이 대화의 실체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면 존 르 카레를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니 결말까지 책을 내려놓지 말 것.
주인공 줄리언 론즐리는 삼십 대 남성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덕분에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던 클럽하우스의 재정 관리인이었다. 안락한 생활에 젖어 들 무렵 조금 더 단조로운 생활을 영위하고자 돌연 이스트앵글리아 해변가에 작은 서점을 연다.
마을의 풍광만큼이나 손님 하나 없는 그야말로 그가 원하던 고요한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던 해 질 무렵,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쳐들어와 이것저것 묻는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중년 신사겠거니 싶었는데 그는 돌연 줄리언 부친의 실명을 대며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였음을 밝히며 줄리언이 숨기고 싶은 부친과의 회상까지 늘어놓는다.
스스로를 에드워드 에이번이라고 밝힌 그는 폴란드에서 온 이민자이지만 지금은 실버뷰라는, 도시 끄트머리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줄리언에게 서점 지하에 '문학 공화국'이라는 비밀스러운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예의상 호응하던 줄리언은 어느 샌가부터 그곳을 공화국에 걸맞게 꾸미기 시작한다.
에드워드의 실체에 관한 비밀스러움이 줄리언의 경계심을 묶어두는 한편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교차하면서 점차 줄리언은 에드워드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드의 부탁으로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가족과도 교류를 이어간다. 결국 에드워드의 딸 릴리에게 호감을 느낄 정도로 관계는 깊어지고,
말기 암 투병을 하던 에드워드의 아내 데버라도 줄리언 앞에서만큼은 본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야기는 데버라의 임종을 앞두고 이들 가족과 줄리언 앞에 놓인 어떤 선택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이 빈틈없는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의 실체는 스파이다. 저마다 임무가 다르긴 하나 누가 같은 편인지는 끝까지 가야 알 수 있다. 에드워드가 간첩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에 근거해 그를 생포하기 위한 일대 작전이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끝없이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스파이의 현실적 묘사가 압권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노리는 타깃이 누구이며, 해결할 과제가 무엇인지 파악했는가? 읽다 보면 내가 기대했던 것과 완벽히 어긋난 결말의 행방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
저자_ 존 르 카레 John le Carré
1931년 영국 도싯주 풀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장학생으로 현대 언어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이튼 칼리지에서 1956년부터 2년간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및 독일어를 가르치다가 1959년 영국 외무부로 일터를 옮겼다.
요원 감시, 심문 등 첩보활동을 거쳐 영국 대사관 제2서기관, 함부르크 정치영사로 활약하다가 영국 해외 정보국 M16에서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다. 1961년 요원 신분으로 첫 장편소설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발표했다. 소설마다 꾸준히 등장해 온 인물, 조지 스마일리가 사건을 풀어가는 이 작품은 “동서 냉전 관계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이어 동서 냉전기 독일을 배경으로 한 세 번째 장편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마침내 그는 세계적인 스릴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 작품의 대성공으로 요원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 추리 작가 협회가 수여하는 골드 대거상을 비롯하여 CWA 다이아몬드 대거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상, 에드거 그랜드 마스터, 말라파르테상, 니코스 카잔차키스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냉전 종식 후에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권 관련 문제에 천착해 왔으며 2019년에는 인권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로프 팔메상을 받았다. 2020년 12월 12일 왕립 콘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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