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뇌
출판사 서평
엘 알(El Al) 화물 수송기가 11층 아파트와 충돌해 주민 39명과 승무원 4명이 사망했다. 네덜란드 언론에서는 이 비극적인 사고를 연일 보도했다. 10개월 후, 심리학자들은 대학생들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조사했다. 그들은 사고 당시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것처럼 암시적인 질문을 노골적으로 했다.
그러자 응답자의 65퍼센트가 텔레비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 영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은 비행기가 아파트에 추락했을 때의 속도와 각도 같은 세부 사항도 기억했고, 충돌 전에 불이 났는지, 충돌 직후 비행기 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기억했다. 하지만 실제로 비행기가 추락했던 순간을 담은 영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유도 질문이나 타인의 반응을 통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기억이 만들어진다.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샥터는 기억에 대한 인상적인 실험연구들을 통해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기억의 오류, 즉 소멸․정신없음․막힘․오귀인․피암시성․편향․지속성 등을 분석해나간다.
‘소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정신없음’은 주의력과 기억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막힘’은 정보를 불러오려고 애쓰지만 정보 찾기에 실패한 것을 말한다. ‘오귀인’은 환상을 현실로 오해하거나 신문에서 본 내용을 친구가 해준 말로 잘못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피암시성’은 과거의 경험을 끄집어내려고 할 때 유도 질문이나 암시에 의해 기억이 주입되는 것을 말한다. ‘편향’은 현재의 지식과 믿음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지속성’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은 걱정스러운 생각이나 사건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도둑맞은 뇌』는 뇌과학이 발견한 기억의 7가지 오류를 분석한다. 기억은 왜 불완전하며, 그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어떻게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살펴본다. 우리는 기억을 잊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며,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기억으로 오랫동안 시달리기도 한다.
누군가와 만났던 일을 잊어버리거나 안경을 놓아둔 자리 혹은 낯익은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최근에 설정해둔 웹사이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새로 만들어야 했던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는가?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기억의 망각 곡선’처럼 우리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거나 사라진다.
우리는 기억을 앨범 속 사진처럼 잘만 보관하면 앨범에 넣었을 때와 동일한 상태로 정확히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카메라처럼 경험을 기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에서 핵심 요소를 뽑아낸 다음에 경험을 재창조하거나 재구조화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의 오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 체계는 어쩌다 이토록 성가시다 못해 종종 위험천만한 특징을 보이게 되었을까? 기억의 7가지 오류는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대자연이 저지른 실수일까? 이 책에는 신경과학에서 이루어낸 여러 발견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학습과 기억이 일어날 때의 뇌 활동을 보여주면서 기억의 7가지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준다.
저자는 기억이 잊힐 때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엿볼 수 있는 신경연상 연구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저자는 기억의 7가지 오류는 기억 체계에 내재하는 단점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기억이 지닌 적응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기억의 7가지 오류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한 기억 체계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자,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억의 소멸은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구체적인 기억이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반적인 묘사로 점차 변화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에서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기억은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로 기록되므로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꽤 정확하게 과거를 기억해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부 내용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후 비슷한 경험을 통해 생겨난 간섭이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이때 현재의 지식과 신념이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에 스며들기도 한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정보를 부호화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따라 기억의 소멸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정보를 정교하게 부호화하는 동안 대체로 기억은 덜 소멸된다.
무더운 6월 말 어느 아침에 한 여성이 차를 몰고 출근했다. 그날도 회의로 가득 찬 바쁜 하루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세 살배기 아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7개월 된 딸을 베이비시터에게 데려다주어야 했다. 그녀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내려준 다음 평소처럼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딸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말이다.
그녀는 그날 오후에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린이집으로 가서 차문을 열었을 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딸이 뜨겁게 달궈진 뒷좌석에서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침에 아들을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난 후 딸이 자동차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정신없음으로 인한 망각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정신없음이란 주의력이 약화된 상황을 말하며, 그 결과 우리는 부호화가 되었더라도 제대로 부호화되지 않았거나 기억해낼 수는 있지만 인출해야 할 때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없음은 종종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일상생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안경을 둔 곳을 잊고, 열쇠를 잃어버리고, 약속을 까먹은 등의 일처럼 말이다.
정교한 부호화를 막는 것은 누군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때 그 사람이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즉, 주의가 분산되면 기억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2011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텍사스 주지사인 릭 페리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3개 부처가 없어질 거라고 이야기하며 상무부와 교육부를 언급하더니 세 번째 부처 이름을 45초 동안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기억이 안 나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몇 분 후 페리는 그 부처가 에너지부라는 것을 기억해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했다. 언론도 그가 후보자로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잔인하게 보도했다. 페리가 ‘에너지부’를 나중에 생각해낸 것을 보면, 그가 토론을 좀더 철저히 준비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6년 후 페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에너지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언론은 “트럼프가 선택한 에너지부 장관 내정자 릭 페리는 에너지부라는 부처 이름도 까먹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는 막힘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막힘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할 때 자주 일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개념적 표상과 어휘적 표상 사이의 연결이 이름에서 미약해지기 때문에 인지 과정에서 쉽게 방해를 받는다. 이는 신경 전달 속도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어서 조금만 더 끌어내려고 노력하면 떠오를 것만 같다. 즉, 어떤 사람의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지만 그 사람의 직업이나 다른 특징들은 알고 있다. 이것은 처음에 기억이 전혀 부호화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 _ 대니얼 샥터(Daniel L. Schacter)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샥터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심리학과 학과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는 인간 기억의 인지적 측면과 신경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이 주제에 대해 4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주된 연구 분야는 기억, 기억상실증, 기억에 대한 인지심리학적․신경심리학적 분석이며, 최근에는 기억 왜곡의 뇌 기제와 인지, 신경영상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기억이 왜 항상 정확하지 않은지, 기억의 왜곡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등 기억의 구성적 특징에 관심이 많다. 그는 기억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기억의 구성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들을 유연하게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오류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 저편의 이방인(Stranger Behind the Engram)』, 『기억을 찾아서(Searching for Memory)』 등을 비롯해 기억과 신경심리학을 다룬 책을 집필했다. 이 책 『도둑맞은 뇌』는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으며, 미국 심리학회의 윌리엄 제임스 도서상(William James Book Award)을 수상했다. 미국 심리학회의 우수 과학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에 국립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020년 그가 테드(TEDed)에 기고한 글이 ‘당신의 모든 기억은 진짜인가?(Are all of you memory real?)’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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